청소년들에게는 연암의 대화치료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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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기석
작성일14-11-21 16:48
조회1,69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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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년 전 연암 박지원이 제시한 자살방지책
청소년들에게는 연암의 대화치료가 절실하다
성적을 잘 받고자 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적을 비관하여 죽다니! 이 역설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약 250년 전에 그에 대한 좋은 방법을 알려준 분이 있으니 그분의 이름은 연암 박지원이다. 그의 방법을 나는 대화치료라고 명명하겠다.
연암 박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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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치료적 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을 알았던 연암이다. 귀한 치료사를 초대하였으니 악공들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일흔 세 살이나 된 민옹은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나누지 않고 다짜고짜 피리를 불고 있던 사람의 따귀를 때렸다. 그러고는 “주인은 기뻐하는데 너는 왜 성을 내느냐”고 하면서 꾸짖었다. 민옹은 이미 우울증 클라이언트에게 대화를 시도했고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대화치료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화치료’(talking cure)란 정신분석가 프로이트에게서 유래된 말인데, 이는 안나 O양의 치료적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 대화치료란 말은 사실 프로이트가 한 말이 아니라 안나 O양이 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이언트가 우울증의 원인이 된 기억을 회상하기 위해 우리는 대화를 통해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대화를 통해 모든 클라이언트가 원인자에 접근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원인자에 접근하여 그 원인자에 대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클라이언트에게서 언어화되면 감정의 소산 (Abreaktion)이 일어난다. 이때 일어나는 감정의 소산을 안나 O양은 “굴뚝청소”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카타르시스란 말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신경증의 원인이 멈추면 증상도 멈춘다”(cessante causa cessat effectus)는 원리에 따라 병은 치유된다.
민옹의 (결국은 연암의) 대화치료는 이 대화에서 감정적 경로를 만들어준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피리 부는 사람이 성을 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민옹은 피리소리가 성을 내는 소리로 치부했을 뿐이다. 그러면 우울증 걸린 18세의 연암을 보고 기뻐한다고 한 것은 또 무슨 말인가? 만약에 민옹이(민씨 성을 가진 할아버지가) 어린 박지원에게 ‘넌 뭐가 그리 우울하냐’고 물었으면 그를 즐겁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은 기뻐하는데”라고 말하며 클라이언트를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치부했으니,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치료사를 경계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부담 없이 자유롭게(자유연상으로) 과거의 원인자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클라이언트는 감정을 동반하여 유쾌하게 이야기(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화치료가 어떻게 감정을 카타르시스 할 수 있는지 그 원리를 보여준다.
수능이 끝나면 성적비관으로 자살하는 청소년 이야기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아이가 과연 성적 때문에 죽었을까? 아니다. 그들은 대부분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 우울증이란 단순한 상실감이나 슬픔이 아니다. 지속적인 정서적 자기학대가 우울증을 만드는데, 성적 비관으로 자살하는 청소년들의 경우 독한 부모(toxic parents)의 가정에서 많이 나온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모들은 스펙이 좋은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는 주로 명문대학이나 좋은 직업에 대한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아이가 그런 부모의 요구나 소원에 부합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의 성적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경우가 문제이다. 이럴 경우 대화치료가 긴밀히 요구된다. 부모의 입장에서 입시 준비하는 아이를 상담자에게 데리고 갈 여유가 없을 것이다. 이때 재빨리 연암과 민옹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연암이 말한다. “나는 음식 먹기도 싫고 밤에 잠도 안 와 병이 되었소이다.” 그러자 민옹은 몸을 일으켜 치하한다. “당신은 집이 가난한데 다행히 음식을 싫어하신다니 부자가 되겠소.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다니 낮과 밤에 곱절을 사는 게 아니오?” 물론 비꼬듯이 이야기하면 우울증에 부채질만 더하겠지만 클라이언트에게 원인자를 알게 하고, 그 원인자를 일거에 제거하는 해석을 내려주는 치료사와, 그것을 받아들여 수행한 클라이언트는 대화치료의 정수라고 하겠다.
부모가 명문대를 나왔다고 아이에게 명문대를 강요하지 말자. 오히려 “공부가 잘 안 되는 모양이구나. 우리 집은 엄마 아빠가 명문대 충분히 많이 다녔으니 너는 대학을 가지 않고 다른 것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니? 음악이나 체육, 오지 여행가, 아니면 사회봉사가.” 물론 민옹처럼 진심이 담긴 말을 해야 한다. 실제로 연암은 사회적 주류에서 이탈하여 자유롭고 노마드적인 삶을 산다.
연암의 대화치료는 열하일기 「호곡장」에서도 진면목을 발휘한다. 1780년 7월 초파일 정사와 한 가마를 타고 냉정을 지나는데 정진사의 마두 태복이가 국궁을 하고는 “백탑이 현신하였기에, 이에 아뢰나이다”하는 것 아닌가! 1천 2백리에 아득히 펼쳐진 요동벌판 위의 백탑을 보고 한 말이다. 그러나 연암은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곳이로구나.”고 응수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호연지기의 터라고 하거나, 압도적인 경관이로구나, 말할 곳에서 통곡하기 좋은 곳이라니?!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다만 칠정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오.” 그렇다. 웃거나 분하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놀랄 때도 사람은 운다. 그러므로 학식이 아니라 감정을 갖고 접근하는 연암의 대화치료는 가히 그 수준을 짐작하기 어려울 듯하다.
진단이라는 것은 원인자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연암이 「호곡장론(好哭場論)」에서 말한 것처럼 울음의 원인자를 모르게 하는 것들이 많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원인자가 다른 경험에 스며들어 버려서 원인자를 찾지 못할 경우, 그 원인자와 유사한 경험을 치유함으로써도 치료는 가능하다.
고액과외 시켜줄까, 아빠랑 대화하자, 힘들지 같은 말로는 우울한 아이를 치유할 수 없다. 하물며 그가 가진 우울증이라는 원인자를 찾아내어 치유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연암이 벼슬을 하리라는 생각을 뒷머리에 잔뜩 가졌더라면 그의 이런 유쾌함과 즐거움의 천재적 글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삶의 즐거움을 학자적 규범 앞에 둔 것이 그를 치유하고 오늘날 그의 글을 읽는 많은 사람을 치유한다. 딸과 아들이 진정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자신들의 스펙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것보다는, 자녀 세대가 마음대로 뛰어놀게 해야 한다. 학교 공부가 아니라 K-Pop스타가 되고 싶은 아이들에게 연암 박지원의 대화치료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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