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들의 이공계 기피현상.. 왜일까?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관련링크
본문
“이공계 막막하니 그냥 의대로” “사회가 준 혜택은 생각 안하나”
이공계 우수 인재가 의대로 몰리는 현상은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다. 최근에는 과학 영재의 상당수가 의대를 선택하는 등 이공계 기피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지난 2년간 국제화학올림피아드 국가대표 수상자가 모두 의대에 갔다. 지난해에는 서울과학고 졸업생의 25% 정도가 의대로 진학했다. 과학에 재능과 흥미가 있었던 학생들마저 의대에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아일보는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20층에서 ‘우수인재 의대진학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첫 번째 ‘2040 열린포럼’을 개최했다. 이우일 서울대 공대 학장이 발제와 진행을 맡았다. 과학고 학생 8명, 일반고 이과 학생 3명, 공대생 3명, 의대생 2명, 학부모 2명이 참석해 이공계 기피 및 의대 선호 현상에 대해 2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
진로 고민 없이 공부에 열중
“과학고 전교 1, 2등이 공대를 간다고 하면 모두 괴짜라고 생각하죠.”
서울 한성과학고 2학년인 강동훈 군(KAIST 합격)은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선배를 ‘전설’이라고 표현했다. 전공과 진로를 생각하는 과학고 학생은 극소수라는 말도 했다. 왜 그럴까.
강 군은 “과학고 학생은 물리나 생물 같은 전공과목이 있지만 이건 보통 중학교 때 과학고 입시 준비하면서 올림피아드 같은 대회에서 상 받으려고 선택한 과목”이라며 “대학 갈 때는 어느 학과에서 무슨 연구를 하는지 보는 게 아니라 그냥 ‘서울대니까 간다’ ‘의대니까 간다’ 이런 생각만 한다”고 말했다.
정은정 양(서울과학고 2학년)도 “미리 꿈을 정해놓지 않으면 입시 때 흔들린다. 부모님이 정해준 대로 해왔던 학생들은 의대로 가는 게 편한 것”이라고 했다.
지금 과학고를 다니거나 이미 졸업한 학생들은 진로교육이 부족한 점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2학년 입시철이 되니까 주위에서 모두 의대를 가라고 하더라. 지금 생각하면 과학고 학생들이 공부는 엄청나게 하지만 정말 자신이 뭘 원하는지 생각해볼 겨를이 없는 것 같다.”(이모 씨·연세대 의대 1학년)
“주위 친구 모두 과학을 좋아하지만 이공계는 끝없이 공부하고 경쟁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다. 진로를 고민하는 학생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해주지 못한다.”(채예린 양·서울 세종과학고 1학년)
“여학생은 이과 기피가 더 심하다. 이과를 간다고 하면 장래 희망이 다 의사다. 이론 중심의 진로교육이 아니라 진짜 도움이 되는 진로교육이 필요하다.”(이귀용 양·서울 수도여고 2학년)
이우일 교수는 “이공계를 졸업하면 길이 넓다는 것이 장점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다. 이공계 출신으로 성공한 선배들이 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는 등 진로지도를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공계는 불안하다고 생각
참석자들은 과학고 출신 등 우수 인재가 의대로 몰리는 건 국가적 차원의 손실이라는 데 공감했다. 과학영재들이 받은 지원과 혜택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분위기나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문제는 이공계를 졸업한 뒤의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므로 진로를 선택할 때 매우 현실적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이공계 출신으로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지만 평균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이 더 안정적이라는 뜻이다.
“개인병원을 접는 의사가 많다는 사실도 알지만 공대를 나온 기술직은 대우가 더 좋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 시야가 좁은 과학고 학생으로서는 이럴 때 의대가 안정적이라는 얘기를 들으면 선택할 수밖에 없다.”(정민승 군·세종과학고 1년)
“공학도는 경쟁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아 불안한 면이 있는데 의대는 입학과 동시에 최소한의 성공이 보장되지 않느냐.”(노정현 씨·한양대 기계공학과 3년)
학부모들도 이공계의 직업 안정성에 우려를 표시했다. 과학고 출신 공대생 학부모인 이명희 씨는 “40, 50대에도 안정된 직장을 다닐 수 있는지 걱정돼서 아이에게 의대를 지원해 보라고 했다. 연구원이 되면 처자식 다 떠난다고까지 말해봤지만 의대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했다.
자녀가 과학고 입시를 준비 중이라는 제지영 씨도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라서 과학고를 가고 나중에 기계공학을 하겠다고 하는데 사실 부모로서는 고민이 된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이공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한 각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추슬찬 씨(포스텍 기계공학과 1년)는 “누구나 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지만 ‘과학자’ ‘연구원’이 뭘 하는지는 모른다. 일반인이 공학자에 대해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민 양(세종과학고 1년)은 “신약 개발이 성공했다면 모두 그 회사 주식에만 관심을 갖지 연구원은 기억하지 않는다”며 “연구 성공의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과 노력에도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과학을 질리게 만드는 교육시스템
국내 과학 영재 교육과 이공계 지원책이 이공계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과학고 학생이 대학교수의 연구에 참여하는 ‘연구 및 교육(Research & Education) 프로그램’이 오히려 이공계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심어준다는 지적이 많았다.
박정우 군(세종과학고 1년)은 “연구의 순기능이 분명 있지만 시간을 너무 짧게 주다 보니 데이터를 조작하는 경우마저 있다. 이런 과정에서 자괴감을 느끼는 학생이 많다”고 했다.
과학고를 졸업한 뒤 의대에 진학한 강모 씨(연세대 1년)도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에게 대학에 가서 연구를 하라면 사실 교수가 하는 거나 다름없다. 결국 1학년까지 열심히 하던 물리에 질려버렸다”고 말했다.
강재윤 군(서울과학고 2년)은 “물리올림피아드 국가대표로 메달을 땄던 선배가 의대에 갔는데, R&E 프로그램을 통해 연구가 자기 적성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했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이공계 지원을 지금보다 훨씬 강화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과학고를 졸업한 이상민 씨(포스텍 물리학과 3년)는 “정부 지원책은 이공계 진입에 초점을 맞출 뿐 진입 이후에는 무관심하다. 장학금만 늘리지 말고 이공계 출신 창업자의 실패를 보완해 주는 등의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인서 군(서울 양재고 3년)은 “성균관대는 삼성에서 지원한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높아지지 않았느냐. 기업이 나서서 대학과 연계해 취업·교육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강태준 군(장훈고 2년)은 “정부가 특성화고 학생의 취업을 앞장서서 지원하듯이 고급인력이 필요한 곳에 이공계 학생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학생들은 이공계에 여학생이 적은 점도 문제라고 털어놓았다. 강동훈 군은 “공대에는 남학생만 많아 의욕을 잃는 경우가 많다. 가뜩이나 결혼시장에서 인기가 없는데 자연스레 이성을 만날 기회조차 없다”며 “이 문제도 이공계를 기피하는 현실적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지금 이공계는 양적인 면보다 질적인 면의 저하가 더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2040 독자포럼에서 발제를 맡은 이우일 서울대 교수(공과대학 학장·사진)는 우수 인재가 이공계를 선택하지 않는 실태를 지적하고 대책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20년 전 정보·통신 분야 기업에서 세계 10위권에 들었던 소니, 파나소닉 같은 일본 기업들은 기술혁신을 하지 않은 탓에 지금은 상위권에서 밀려났다”며 “우리도 살아남으려면 계속 기술 혁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공계 기피현상을 보면 우리나라가 계속 혁신을 해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며 각종 통계 수치를 보여줬다. 지난해 서울대 수시모집에서 공대의 9.3%, 자연대의 16.5%를 충원하지 못한 점을 두고 ‘초유의 사태’라고도 표현했다.
이 교수는 “양적인 지원자 감소보다 더 큰 문제는 우수 학생들이 이공계에 오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현상의 이유로 △고교생의 수학 과학 기피 △정치인의 무관심 △대학에서 이공계 과다 정원으로 희소가치 하락 △열악한 근무 환경과 조건 △이공계 우대정책의 실종 등을 언급했다.
이 교수는 해결 방안으로 이공계 연구 개발직을 많이 창출하고 인문학과의 융합을 통해 다양한 이공계 교육과정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창업에 실패했을 때도 안전한 퇴출 경로를 만들어주고 평소 학생들에게 직업의 장단점을 정확히 전달하자는 방안도 제시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